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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June Vol.36 No.2 ISSN 1598-8384

자유기고

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며 ‘수작(手作)부린’ 송구함에 대한 辯:

36대 학회장 역임,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이철훈 명예회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작부리다’라는 말은 유감스럽게도 요즘엔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다’라는 부정적인 말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으나, 사실은 술자리에서 유래된 멋진 우리말 중 하나로 ‘서로 술잔을 주고(수; 酬) 받으며(작; 酌) 이야기함’을 뜻합니다. 오십 년 전인 1973년 3월, 우리의 선배들께서 척박한 환경에서도 미생물산업 분야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갈 ‘학술 및 기술 교류의 장’을 만들고자 창립하신 우리 학회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를 축하하고 그동안 헌신하신 수많은 선배님들을 기리며 밤새 ‘수작부리며’ 스스로 자축함을 송구스럽다 표현할 이유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제가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송구하다는 것일까 궁금하실 겁니다.

그림 그리기에 대단한 재능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린 시절에 여러 차례 소위 말하는 미술대회에 참가하여 운 좋게 몇 번 상을 탄 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서 ‘그림 좀 그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인지, 그림 그리기에 큰 저항이 없었고, 심지어 고교시절엔 미술대학 진학을 잠시 고민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약학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또 독일 유학 및 기업연구소 근무 등으로 청장년 시절에는 자연히 그림 그리기와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지요.

정년퇴임을 몇 년 앞두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열정적으로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림 그리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대두된 고민은 ‘그렇다면 과연 무슨 그림을 그릴 것인가!’ 붓을 잡지 않았던 그 오랜 세월을 만회하기 위해, 지금부터 다시 교습을 받기에는 제 의욕이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현재 상황에서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장르를 선택하기로 했고, 그것은 바로 제 주변의 많은 벗들에게 그림을 통한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십여 년간 왕성히 활동했던 학교와 학회가 ‘취미 삽화가’의 주된 활동무대가 되었고, 많은 후배들께 삽화와 격려편지를 전해주는 제 나름대로의 선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림 1)



그림1


그림 1: (사)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후배 학회장 삽화 일부


그 덕분이었을까? 한창 무덥던 지난 2022년 여름 어느 날, 후배(이정기 회장, 홍순광 전 회장, 이규호 차기회장)들의 식사 제안에 반가운 마음으로 냉큼 달려갔습니다. 수작(酬酌)을 부리며 화기애애한 시간이 흐르자, 참석한 후배들께서 “2023년에 ‘학회 창립 5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고자 하니, 직접 손그림으로 엠블럼과 50년 역사 삽화를 그려 줄 수 있겠는가?” 놀라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 제작물을 행사장 곳곳에 대형 출력물로 전시하면 의미 있고 멋진 기념식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더군요.

그러나 통상 엠블럼이나 로고는 주문자의 다양한 의견이나 수정 요청을 수시로 반영해야 하므로, 컴퓨터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므로 손그림으로 그려 달라는 부탁은 사실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제안이었지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제가 ‘수작(손재주; 手, 지을; 作)부릴 각오’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결국 후배들의 도전적인 제안을 깊이 고민하지 않고 냉큼 수락한 것이 문제였고, 후에 있을 상당한 어려움과 수고스러움을 저 스스로 자초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1. (사)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50주년 기념학술대회 엠블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손그림 엠블럼 제작과 관련하여 예상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22년 7월 15일부터 3개월에 걸쳐 ‘수작(手作)부리기’는 진행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작 의도를 중심으로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단순하면서도 우리 학회가 갖는 다양한 스토리(과거/현재/미래)를 포함하는 동시에 매우 한국적인 고유의 구조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나무 중에 으뜸이며 또한 가장 한국적인 ‘붉은 소나무(Korean red pine)’를 기본 틀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인 채색은 우리 민화의 색감과 터치가 재현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창립부터 28년간 사용된 (사)한국산업미생물학회 로고인 발효조 안의 교반기(agitator) 문양 28개를 소나무의 뿌리로 표현하였고, 2001년부터 22년간 사용된 (사)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로고에서 미생물 문양 22개를 붉은 소나무의 푸르른 잎으로 묘사했습니다. 침엽수인 소나무 잎을 둥그런 미생물의 모양으로 표현함이 쉽지 않았으나, 채색 과정에서 붓의 터치를 칩엽수답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영남지부 및 호남제주지부를 두개의 굵은 가지로, 또 15개의 잔가지는 학회 제학술분과 15개를 상징하며, 소나무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채색되지 않은 손은 지난 50년간 우리 학회를 열정적으로 그러나 조용히 동행하고 있는 학회 회원들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림 2)

또한 융합과학의 시대에 농학, 이학, 공학, 의약학의 효과적인 융합을 통해 학회의 또 다른 50년의 꿈과 발전을 상징하는 ‘샘솟는 물줄기’ 문양을 가운데에 배치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지향하는 우리의 자세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림2


그림 2: KMB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최종 엠블럼(: 먹과 수채, 31 x 41cm) 및 제작 의도()


엠블럼을 완성하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일은, 앞서 예상한 바와 같이 컴퓨터 지원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은 손그림이라서 실수와 수정을 할 때마다 매번 다시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고단한 일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략 최소 도화지 20장은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완성된 최종본도 매우 송구스러운 수준의 작품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매우 험난했습니다. 대략 그 과정을 대표적인 몇 가지 도안을 발췌하여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그림. 3)



그림3


그림 3: 초기부터 최종까지의 엠블럼 도안 과정



2. (사)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50년의 역사:


두번째 작업인 역사 삽화는 2022년 10월 4일부터 11월 16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첫 작업인 엠블럼 제작에 비해 손그림으로 그리기에 적합하여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A2 크기의 도화지(36 x 51cm)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회에서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그 많은 역사적 이벤트(대략 40여개)를 모두 채택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지면이었습니다. 따라서 삽화를 제작하기 위한 첫번째 관문은 40여개의 역사 이벤트에서 18개 내외로 선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 작업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최대로 공정하게 판단해서 ‘우리 학회 단독으로 추진한 의미 있는 역사적 이벤트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과 같은 13개 항목(18개 이벤트)으로 확정하였습니다. 그 내용과 최종 삽화(기억이 역사가 되다)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 4)
한국산업미생물학회 창립 및 국문학술지 창간(1973년), 사단법인 출범 및 학회상 시상(1980년), 지부학회 창립 및 간사회 제도 도입(1989년), 학술분과 개설(1990년), 사무국 오픈 및 영문학술지 JMB 창간(1991년), 창립 20주년 기념(1992년), 산미클럽 창립(1996년), (사)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개명(2001년), 학회 홈페이지 완전 개편(2002년), 창립 30주년 기념(2003년), 동계심포지움 개최 및 창립 40주년 기념(2013년), 국문학술지 MBL 개명(2013년), 창립 50주년 기념(2023년).




그림3


그림 4: 지난 50년간 18개 주요 이벤트를 다룬 삽화 “기억이 역사가 되다” (먹과 수채, 36 x 51cm)





3. Epilogue: 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며 ‘수작(手作)부린’ 송구함에 대한 辯


두서없이 작성하다 보니, 이 기고문의 주제가 무엇이었는 지를 잊었습니다. 우리 학회의 ‘창립 50주년 기념’이라는 영광스럽고 감격적인 행사에, 보잘것없는 얄팍한 손재주를 내세워서 엠블럼을 만든다는 둥 삽화를 그린다는 둥, 수작(手作)을 부려 오히려 기념학술대회의 격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닌 지! 너무나 죄송스럽고 송구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은 이 상황을 다시 담기 쉽지 않으니, 여러 선후배 회원들께서 제작 과정에서 쏟은 제 정성을 보시어 측은히 여기셔서 제발 제가 부린 수작을 너그럽게 받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하고 또 축하드립니다!